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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소 학술동향] 고대 두만강 유역의 주민집단과 고구려의 책성(1부)

    관리자 2020-11-24 1205

    [도판 1] 혼춘 온특혁부성 도면 (출처 : 鄭永振, 1999, 「延邊地域의 城郭에 대한 硏究」, 『高句麗硏究』8)


           고대 두만강 유역의 주민집단과 고구려의 책성 (1부)


                                                                                                                              이종록(고려대학교 박사과정)


    고구려의 책성(柵城)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등의 사료에서 등장하는 지명인 책성(柵城)은 고구려의 지역 지배방식과 관련해서 오래전부터 여러 연구자에게 주목되어 왔다. 책성은 고구려본기 태조왕(太祖王) 조의 기사를 시작으로 여러 사료에서 비록 단편적이지만 장기간에 걸쳐 등장하고 있으며, 「이타인묘지명(李他仁墓誌銘)」에서 나타난 것처럼 고구려 멸망 시점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후 발해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가 ‘책성부(柵城府)’로도 불렸다고 하여 발해 시기에도 그 명칭이 잔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책성이라는 지명은 약 6백여 년에 걸쳐 그 존재가 유지되어 역사에 그 흔적을 남겨왔던 셈이다.

      사실 고구려사에서 국내성(國內城)과 같은 도성을 제외한다면 단일 지명이 초기 기록부터 나타나 멸망기까지 유지된 경우는 드물다. 또 책성은 사료 내에서 단편적인 기록들만이 확인될 뿐이지만, 이 한정된 기록으로부터도 그 중요성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여타 성이나 지방통치단위 중 주목할 만한 기구였음이 틀림없다. 그렇기에 지금까지의 여러 연구에서는 고구려의 동북 지역 영역 문제에 관하여 책성의 기능에 대해 다각도로 주목해 왔으며 관련 연구도 많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중요성에 비해 아직 해명되지 못한 요소도 적지 않으며, 이는 후속 연구들에서 보완되어야 하는 사항일 것이다. 여기에서는 책성에 관하여 지금까지 밝혀진 이곳의 연혁 그 기능, 그리고 향후 연구에서 기대하는 점들을 정리 차원에서 간략하게 이야기해 보자.


    책성과 고구려의 북옥저 정벌

      책성은 사료상에서 어느 시기에 처음 설치되었는지 분명히 나타나지 않으며, 그 위치에 관해서도 오랜 기간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삼국사기』 태조왕 조에서 국왕이 “(수도로부터) 동쪽으로 순행[東巡]”했다고 하거나, 『위서(魏書)』에서 책성은 고구려의 최동단 거점으로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두만강 유역에 위치했을 것으로 본다. 중국 동북 3성에서 두만강 유역의 혼춘(琿春)‧연길(延吉) 등의 지역은 현재까지 다수의 고구려 성지가 확인된 곳이다. 비록 서부에 비하면 그 수도 적고 고구려 성의 여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규모도 대형급에 속하는 성들도 확인되고 있다.

      기존 연구에서 책성의 위치는 크게 혼춘 설과 연길 설로 나누어졌으나, 오늘날의 연구에서는 혼춘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 이유는 주로 중국 혼춘에서 확인되는 팔련성(八連城)의 존재로 인해 발해 동경용원부의 위치로 이 지역이 유력해졌기 때문이다. 동경용원부는 앞서 말한 대로 ‘책성부’라고 불렸기 때문에 기존 연구 중에서는 현재의 팔련성 부지에 고구려의 책성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팔련성지의 조사 결과 이전 시기에 축조된 별다른 건축물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현재는 팔련성지 외의 다른 지역에서 책성을 구하고 있다.

      혼춘 일대에는 성지 유적으로 살기성(薩其城)과 온특혁부성(溫特赫府城)·석두하자고성(石頭河子古城)·간구자산성(干溝子山城)등이 확인되며, 이 중 살기성과 온특혁부성이 책성의 유력한 후보지로 지목되고 있다. 연구자에 따라 살기성이나 온특혁부성 중 하나를 책성으로 지목하거나, 고구려 도성이 산성-평지성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는 형태였다는 점을 감안하여 책성도 온특혁부성과 살기성이 쌍을 이루는 형태였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 고구려의 도성제에 관한 연구들에서는 이 산성-평지성 체제의 실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에, 행정구역으로서의 ‘책성’과 실제 성지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향후 보다 논의가 필요하다. 또 온특혁부성이나 살기성 모두 책성과 같은 중요 거점의 성지로 보기에는 그 규모 혹은 입지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아, 실제 성지의 비정은 향후 연길설 등의 이설과 함께 보다 면밀한 조사 후에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도판 2] 혼춘 살기성 도면 (출처 : 鄭永振, 1999, 「延邊地域의 城郭에 대한 硏究」, 『高句麗硏究』8)

      오늘날 혼춘이 위치한 두만강 유역은 기원후 1세기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고구려가 영역으로 편입한 지역이다. 고구려는 이 지역 정벌을 완료한 이래 다양한 조치를 취하여 그 지배력을 다져왔으며, 그 지배의 중심에는 책성이 있었다. 『삼국사기』에서는 태조왕이 재위 46년째에 해당하는 기원후 98년에 약 7개월에 걸쳐 책성에 순행하였다고 전한다. 또 4년 후인 102년에도 사람을 책성으로 파견하여 그 지역을 안무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순수의 목적은 책성의 주 관리 대상이 사료상에서 ‘북옥저(北沃沮)’로 나타나는, 고구려와는 이질적인 문화를 보유했던 주민집단의 거주지였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북옥저는 두만강 유역‧연해주 남부 등지에 분포하였던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 혹은 폴체 문화에 속했던 집단으로 고구려가 동명성왕 시대부터 여러 차례의 군사적 활동을 통해 복속시킨 것으로 전하고 있다. 고구려는 함흥 일대의 남옥저(南沃沮)와 함께 태조왕 시대에 이르러 남·북옥저 전체의 정벌을 완료하였으며, 그 결과 고구려는 함흥에서부터 혼춘 일대에 이르는 동해안 지역을 점유할 수 있었다. 곧 태조왕의 순수는 이 시기 편입된 지역에서 고구려인들과 다른 문화를 보유한 주민집단에 대해 지배력을 다지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연구에서는 책성이 고구려 초기 북옥저 지배에서 핵심적인 기구였던 것으로 파악한다. 이는 『삼국지』 동이전 동옥저 조에서 북옥저가 책성을 의미하는 ‘치구루(置溝婁)’로 불리기도 했다는 언급에서도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즉 북옥저가 책성 그 자체와 동일시될 정도로, 3세기 무렵에 이르러서는 고구려의 이 지역 지배에 핵심적인 기구로 정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북옥저로 비정되는 문화집단, 곧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나 후대의 폴체 문화의 분포상으로 볼 때 혼춘 일대가 특별히 이들 문화의 집결지라고 보기는 어렵다. 나아가 북옥저의 범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많지만, 그 기저가 된 문화집단은 연해주 남부에서부터 연변 지역, 함경북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째서 북옥저로 칭해지던 집단이 ‘책성’이라는 1개 거점과 동일시되며, 나아가 이들의 지배에 핵심 거점이 되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책성이 위치한 지점이 바로 위의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 폴체 문화의 옥저, 이후 읍루인들까지 통제 및 감제할 수 있는 동서 주요 교통로의 결절점이라는 데에 있었다.


    [도판 3] 琿春 일대 주요 교통로
    (1溫特赫部城 2薩其城 3石頭河子古城 4亭巖山城 5干溝子山城 6城子山山城 7河龍古城 8興安古城)

      혼춘은 서쪽 방면으로는 하알하-포이합통하(布爾哈通河) 일대의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집단의 집결지로 이어지며, 더 멀리는 발해의 ‘일본도(日本道)’의 종착점으로서 연변-돈화-길림으로 나아가 부여와 통할 수 있었다. 동쪽으로는 연해주 남단, 혹은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의 중심지역인 수분하(綏芬河, 라즈돌나야 강) 유역으로 이어지고 있어서 이 지역의 주민집단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창구였다고 할 수 있다.

      또 혼춘은 동북쪽으로는 혼춘하를 거슬러 합달령(哈達門)-마적달(馬適達)-춘화(春化)-초평(草坪)-난가당자(蘭家趟子)를 지나 동녕에 도달하는 경로가 있었다. 동녕은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의 주요 지역이었으며, 이를 잇는 혼춘하 연안에서도 같은 문화의 흔적이 다수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동남쪽으로 장령자를 넘어 러시아 크라스키노-수분하 하류-우수리스크로 가는 경로가 있었는데, 잘 알려진 대로 수분하 하류 일대는 기원전 1세기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의 주요 분포지이다. 즉 혼춘 일대의 책성은 연해주-연변 일대의 주민집단과 통하는 교통로의 집결지이며 이들을 동시에 감제할 수 있는 요지였던 것이다.

      이처럼 초기부터 고구려가 책성의 지배에 주력했던 것은 이 지역이 지닌 교통의 요지로서의 중요성 때문이며, 이 점은 고구려의 이 지역 지배방식을 감안하면 더욱 중요한 문제였을 것으로 본다.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고구려는 옥저의 주민들에 대해 양식과 소금 등의 물자를 공물로 받았으며, 이들을 고구려의 중심지까지 나르게 하였다고 한다. 이를 본다면 책성의 교통로는 단순히 요충지로서의 중요성만이 아니라, 고구려인들을 위한 물자 공급을 위한 루트로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즉 고구려가 1세기 순수를 반복하여 이 지역의 안정에 주력했던 것은 교통의 요지에 대한 점검의 목적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해야 하는 점은, 혼춘 일대에서는 기원후 3세기 이전 시기에 해당하는 고구려 관련 유물이 극히 적다는 사실이다. 이는 책성이 사료상에서 그 존재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동시에, 고구려가 이른 시기부터 두만강 유역(북옥저)를 점령했다는 점에는 학계에서 이견이 없는 것과 대비되는 현상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구려가 기원후 1세기라는 이른 시기부터 지배권 확보에 공을 들였다면, 이 지역에 고구려계 유물 전반이 빈약하다는 점은 아무래도 이상해 보인다.

      물론 이 지역의 발굴 조사가 상대적으로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후 관련 유물·유적의 발견되어 사료와 부합하게 될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현상은 기존 연구들이 지적한 대로 이 지역에 대한 통치 방식의 결과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는 『삼국지』 동이전 동옥저조에 나타나는 것처럼 각 지역의 토착 집단들을 유지시키고, 그들로부터 공납물을 수거하였다고 한다. 오로지 책성을 비롯한 특정 거점만을 관리하여 이를 중심으로 공납물을 수거하는 형식을 통해 이 지역의 지배를 유지하였던 것 같다. 그로 인해 이 지역의 피지배층인 주민집단은 독자적인 문화를 장기간 보유하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문화가 침투할 여지가 적었던 것이다. 이는 이 지역에서 확인되는 고구려계 유물들이 기와편과 같이 성지 유적 근처에서 집중 발견된다는 현상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했다면 고구려에게 있어서 책성의 지배권 유지란 곧 이 지역 전체의 지배와 직결되었을 것이다. 이 ‘이종족’들에 대한 직접적이고 완전한 지배를 실현하기 어렵다면, 이들과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통제의 중심인 책성에 지배력 유지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고구려는 이 지역에 대해 이후 어떤 조치를 취했으며, 후기에는 책성이 어떻게 유지되었을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