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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소 학술동향] 실크로드를 향한 수(隋) 양제(煬帝)의 야망 (1부)

    관리자 2020-06-30 213

    [사진 1] 돈황 막고굴(莫高窟) 제45굴 남벽에서 발견된 성당(盛唐) 시기의 벽화 「상인우도(商人遇盜)」
    이 벽화는 상인이 도적을 만나 칼로 위협받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도판 출처: 돈황연구원 저, 최혜원·이유진 역, 2001 『敦煌』 범우사, 187쪽)

     

             실크로드를 향한 수(隋) 양제(煬帝)의 야망 (1부)
     

                                                                                                                       이진선(동국대 불교학술원 연구원)

      수(隋) 왕조는 널리 서역(西域)으로 세력을 확장해 동서 교역의 이득을 차지하려고 하였다. 당시 돈황(敦煌)에서 출발하는 세 가지 동서교통로 가운데 북도(北道)는 이오(伊吾, 지금의 哈密)→포류해(蒲類海)→철륵부(鐵勒部)→돌궐(突厥)의 가한정(可汗庭)→불름국(拂菻國, 당시 비잔틴 제국)을 지나는 경로이고, 중도(中道)는 고창(高昌, 지금의 吐鲁番)→언기(焉耆)→구자(龜茲)→소륵(疏勒)→총령(葱嶺, 파미르 고원)→소무구성(昭武九姓)→파사(波斯, 당시 페르시아)를 지나는 경로이며, 남도(南道)는 선선(鄯善, 지금 신장위구르자치구의 鄯善)→우전(于闐)→주구파(朱俱波)→총령(葱嶺)→호밀(護密)→토화라(吐火羅, 지금 아프가니스타 서북부)를 지나는 경로였다. 이들 실크로드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동서교역의 요충지라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동서 교역의 중계자로 부를 누리고 있던 토욕혼(吐谷渾)과 이오(伊吾) 땅을 차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수 왕조는 1차적으로 남쪽에 위치한 진(陳) 왕조를 정복해 중원을 통일하기 이전에는 서역으로 힘을 쏟을 여력이 없었다.
      수 왕조가 중원 통일에 전념하던 당시 서역을 호령하던 세력은 북방의 초원에 위치한 돌궐(突厥)이었다. 돌궐은 비록 내부 분열로 582년 동·서로 분리되었지만, 여전히 토욕혼, 이오, 고창(高昌) 등의 나라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특히 토욕혼 왕실과는 상호 통혼으로 결속을 다졌는데, 돌궐 계민(啟民) 가한(可汗)의 아들 막하돌설(莫賀咄設, 이후의 處羅可汗)의 외가가 바로 토욕혼이었다. 토욕혼 역시 돌궐의 휘하에 있으면서도 서역에서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서역(西域)을 향한 양제(煬帝)의 포부

      수 문제(文帝) 초기에는 돌궐이나 토욕혼 등의 공격에도 변경(邊境)의 둔전(屯田)을 철수하는 등 서역제국(西域諸國)에 대해 다소 수세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러나 수 왕조가 장손성(長孫晟)의 이간책으로 돌궐의 내부 분열을 가속화 시키고, 문제 개황(開皇) 9년(589) 남방의 진(陳)을 끝으로 천하를 일통하면서 대(對) 서역 정책은 전환점을 맞이한다. 개황 17년(597) 토욕혼 가한(可汗)의 폐립(廢立) 문제로 토욕혼 국내가 혼란스러웠던 상황 역시 수의 서역 경영에 좋은 여건을 형성해 주었다.
      수 왕조의 서역 진출은 다음 양제 시기에 본격화되었다. 양제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차리고 실행에 앞장 선 것은 바로 배구(裴矩)이다. 그는 양제를 위해 한 가지 간언을 올린다. 즉 당시 돌궐과 토욕혼이 호족(胡族)과 강족(羌族)의 땅을 나누어 관장하고 있어 그들이 조공하러 오는 길을 막고 있으며, 상인들은 중국의 신첩(臣妾)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당시 교역의 어려움에는 사막이라는 거대한 자연뿐 아니라 약탈을 해가는 도적떼도 있었다. 게다가 오아시스 소국가들 역시도 세력 확장을 위해 서로 침략하기 일쑤였다. 때문에 오아시스 소국가들이나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강대국의 휘하에 있으며 보다 안정적인 교통로의 확보를 원했다. 배구는 바로 이러한 점을 꼬집어 양제에게 간언한 것이었다.
      이어서 배구는 토욕혼은 쉽게 병탄할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이는 양제에게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좋은 명분이 되었고, 배구의 말을 들은 양제는 자신의 포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감개무량하여 진(秦) 시황제(始皇帝)와 한(漢) 무제(武帝)의 공로를 흠모해 장차 서역과 통교하려는 마음을 가졌고, 사이(四夷)의 경략에 관한 일은 모두 배구(裴矩)에게 위임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권180, 양제 대업(大業) 3년(607) 10월 조

      양제가 흠모했던 진(秦) 시황제(始皇帝)는 시황(始皇) 27년(기원전 220) 농서(隴西)를 순행하여 새외(塞外)에 위엄을 보였고, 한(漢) 무제(武帝)는 기원전 139년 장건(張騫)을 파견하여 동서교통로를 개척하고, 원정(元鼎) 5년(기원전 112) 서쪽으로 순행하여 조려하(祖厲河)에 이르렀다.
      장건(張騫)은 서역에 관한 지식을 처음 공식적으로 중국에 알려준 인물이다. 당시 유목 사회에서는 월지(月氏)와 흉노(匈奴)라는 강력한 두 세력이 있었다. 그런데 고비 사막에 있던 흉노가 하서회랑(河西回廊)에 본거지를 두고 있던 월지를 공격하였고, 이 월지는 흉노에게 밀려 점차 서쪽으로 도망가다가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앙아시아에 정착하였다. 도피 중에 월지의 왕은 흉노에게 잡혀 살해당하고 두개골이 술잔으로 만들어지는 치욕을 당했다. 한 무제는 북방의 흉노를 공격해 영토를 넓히려고 계획 중이었는데, 흉노인(匈奴人) 포로에게서 월지왕의 소식을 듣고는 흉노와 원수관계가 된 월지를 찾아가 함께 흉노를 공격하고 동맹을 맺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파견된 사절이 장건이었다.
      기원전 139년 장건은 길 안내자와 부하들 100여 명을 데리고 장안에서 월지로 향하는 여정을 출발하였다. 당시의 교통로상 월지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흉노 땅을 거쳐야 했는데, 결국 흉노에게 잡힌 장건은 약 10년의 세월을 흉노 땅에서 살았다. 그러나 아직 자신의 임무를 포기하지 않았던 장건은 가족과 몇 명의 부하를 데리고 기원전 129년 경 흉노 땅을 탈출, 파미르 고원을 넘어 월지국에 이르렀다. 하지만 월지는 이미 비옥한 땅에 정착한 상태였고, 흉노가 여전히 강했기 때문에 굳이 전쟁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장건은 빈손으로 귀향길에 오르게 되는데, 흉노를 피해 타림분지 남쪽으로 먼 길로 돌아갔지만 재차 흉노에게 잡히게 되고, 1년 남짓 흉노 땅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 탈출해 장안으로 귀환하였다.


    [사진 2] 돈황 막고굴(莫高窟) 제323굴 북벽에서 발견된 초당(初唐) 시기의 벽화 「장건출사서역(張騫出使西域)」
    이 벽화에서 묘사된 뒤의 두 사람은 지절(持節)을 들고, 장건은 한 무제의 명령을 받아 실크로드를 개척하려 나서는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도판 출처: 段文傑, 樊錦詩卷 主編 · 中國敦煌壁畫全集編輯委員會 編, 2006 『中國敦煌壁畫全集 5 敦煌初唐』 天津: 天津人民美術出版社, 2006, 106쪽)

      장건이 동서교통로를 개척했다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장건이 서역으로 떠나기 이전부터 비공식적으로 사람들이 교류하고 있었다. 이는 장건이 지금의 사마르칸트 너머에 있는 대하국(大夏國)에 도착했을 때 그 지역의 시장을 둘러보고 남긴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즉 『사기(史記)』에 의하면, 장건은 자신이 중국인 최초로 서역에 이르렀다고 생각해 감격해 하며 시장을 산책하던 중 놀라운 모습을 목격하는데, 대하국의 시장에서 사천(四川) 지방의 옷감과 대나무 지팡이들이 버젓이 팔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들 물품은 인도를 통해서 중앙아시아로 유통되고 있었다. 중앙아시아 상인들은 오아시스로와 마역로(馬易路)의 주역으로 유라시아의 경제를 움직였던 것이다.
      이렇듯 진 시황과 한 무제의 업적을 흠모한 수 양제는 서역으로의 세력 확장을 위해 사절단 파견, 사신과 상인의 왕래를 담당하는 관부(官府) 설치, 대외 전쟁, 하서(河西) 지역 순행(巡幸) 등 다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