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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소 학술동향] 토기와 위신재로 본 부여의 성립과 교류 네트워크

    관리자 2020-06-29 201

    [그림 1] 시황산툰유적 M1 출토(박수진 2015 『동아시아 촉각식검의 변천과정』 수록)

     

            토기와 위신재로 본 부여의 성립과 교류 네트워크

     

                                                                                                                                     윤정하(한성백제박물관)

     

    머리말

      기원전 4세기경부터 중국 동북지역은 청동기시대에서 초기철기시대로 이행되는 과정을 거쳤는데, 이 때 중원세력의 세력 확장 및 영역화와 후기 고조선의 영역화, 그리고 흉노의 세력 확장으로 인한 각 민족의 연쇄적 이동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각 지역의 집단들은 자신들만의 교류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되는데, 서류송화강(西流松花江) 중상류 지역 역시 교류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부여’라는 정치체가 탄생하게 되었다.

     

    부여고고학 연구의 현재
      부여 관련 고고학적 성과를 중점으로 하는 단행본이 두 권밖에 출간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간 부여사에 대한 관심은 한국학계에서도 그리 높지 않았다. 이는 문헌자료의 한계와 중국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부여의 지리적 특성으로 인한 고고학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부여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고구려와 달리 전적으로 부여의 강역은 현재 중국에 있다는 점도 연구의 난맥상에 일조한다. 중국과의 수교(1992) 이전까지는 부여고고학을 다룬 글을 찾기 힘들다. 그러나 이후 중국과의 수교가 진행되면서 그간 중국에서 이뤄진 발굴성과와 고고학논문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박양진, 송기호, 오영찬과 같은 학자들이 당시 출간되어있던 유수 노하심 유적 발굴보고서를 중점으로 논문을 게재하였는데, 이때의 논문은 주로 노하심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을 재정리하여 소개하거나 유적 답사 보고서에 한정되었다.
      2000년대에는 대부분의 논문이 2005년에 발간된 현상이 보인다. 이는 2002년 시작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학계의 대응으로, 고구려뿐만 아니라 부여사 연구 역시 쟁점으로 떠오른 것이다. 1990년대와 마찬가지로 중국 길장지구의 고고학 자료를 기반으로 부여의 선문화와 고고문화의 전개과정을 추정하는 논문이 지속적으로 출간되었다. 박양진은 기존의 부여고고학의 중심소재이던 노하심 유적을 제외하고 길림시 동단산, 남성자, 학교동산 등의 유적으로 부여의 취락과 묘지를 연구했으며, 이종수는 무덤이 출토된 위수 노하심, 모아산, 학고동산유적을 종합·정리하여 부여의 매장방법과 묘제 등을 정리했다.
      또한, 2000년대는 동북공정의 여파로 고조선·고구려와 함께 부여의 기층민 및 근원이 예맥족에서 왔기 때문에 한국의 역사에 속한다는 점이 강조된 논문이 다수 출간되었지만, 2010년대에는 그 논조가 바뀌며 2000년대의 이 시기에는 한국고고학계에서는 고고학 내 내셔널리즘 혹은 민족주의에 대한 자정의 목소리가 높아짐과 동시에 내셔널리즘을 잘 보여주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한국의 ‘환단고기’ 및 유사역사학자들의 등장으로 인해 더욱 고고학 내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고조된 것이다. 고고학계에서 내셔널리즘을 지양하게 되고, 여전히 발굴성과의 증대가 없자 고고학계에서는 기존의 부여 중심지를 위주로 진행하던 연구에서 나아가 매우 다양한 주제의 연구로 확대되었다. 우선 오강원, 유은식과 같은 학자들이 인근까지의 고고자료를 다루어 거시적 관점에서 당시 고고문화 간의 관계를 다루는 연구자들이 논문을 출간했다. 또한, 특정 유물을 세부적으로 분석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 특징이 있다. 이와 같이 세부 유물의 시공간적 위치를 정리한 논고들의 경우 각 유물의 편년에는 용이하지만, 아직까지 부여의 고고문화에 대해 정립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부여의 문화상을 전반적으로 파악할 수 없으며 공반유물에 대한 분석도 담고 있지 않아 교차편년이 불가능하다는 한계가 있다. 그동안 부여 개별 유적이 가지는 맥락을 넘어서는 논지가 전개되기 힘들었던 상황으로, 토기와 청동기, 철기 등 각 유물이 가지고 있는 특성과 고고학적 함의를 고려하면서 각 유물군을 통해 알 수 있는 지역 간 관계에 대해 심도 깊은 논지가 전개되지 못하였다.

     

    위신재와 토기로 보는 부여의 고고문화

      부여의 정치체의 성격을 확인하기 위해 우선 정치권력의 형성 전략에 대해 살펴보아야한다. 국가의 단계가 나눠지는 가장 큰 기준은 권력의 집중도인데, 복합사회로 진입하면서 생겨난 권력이 점차 정치화·중앙집권화가 진행됨에 따라 국가가 출현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피지배자들을 권력자에 종속된 상태로 유지하게 하는 권력의 원천은 지역·시기·국가단계마다 다르다.
    이때 권력은 두 가지 배타적인 방법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을 주지해야한다. Blanton el.(1996)에 따르면 흔히 권력의 집중도에서 말하는 ‘권력’은 배타적 전략을 통한 권력(the exclusionary power strategy)을 말하지만, 정치적 권력은 배타적 전략뿐만 아니라 공동 정치화 전략(the corporate political strategy)을 통해 형성되는 이중적 구조를 지닌다. 공동 정치화 전략이란 배타적인 권력화 전략을 억제하는 하나의 전략으로 타 정치체와 권력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여와 같이 여러 정치체가 하나의 국가공동체로 유지되었던 국가에서 중요한 정치적 전략은 공동 정치화 전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공동 정치화 전략을 실현하기 위해 부여의 여러 지배계층들은 일종의 외교적 교역(Diplomatic trade)을 시도했을 것이다. 그 중 외래물품과 위신재, 고가의 사치품의 경우 사회 내에서 권력과 부를 상징하는 가치를 지니며, 이와 같은 물품은 부장품으로 매장되어 고고자료로 발견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매장행위는 단순히 죽은 자가 거처할 장소를 마련하는 것뿐만 아니라 피장자의 권력을 상징하며 유지하는 장치로 행해지기에 생전 피장자의 권력이나 부를 상징하는 물품을 부장품으로 선별하여 매장하기 때문이다.
      이때 위신재(위세품)는 ‘사회 지배층이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를 드러내 보이기 위하여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희귀물품(이한상 2007)’ 혹은 ‘사회적 지위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물건(박양진 2001)’ 으로 정의할 수 있다. 위신재는 대체로 사치품과 그 의미가 유사해보이지만 차이가 있다. 사치품은 값어치가 높은 물품으로 그 자체로는 사회적인 지위 및 관계를 상징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위신재는 사회적 관계 및 상징성을 내포하는 상징품이다. 즉, 대체로 값어치가 높지만, 해당 사회에서 상징 및 사회적인 상징을 내포할 때에 보다 적극적인 위신재로 사용될 수 있다. 특히 부여와 같이 여러 문화가 공존하는 지역의 경우 대등한 정치체들의 상호관계를 통해 하나의 국가를 형성한 것이기 때문에(Renfrew & Cherry 1986; Blanton el. 1996), 부여에서 위신재는 대외관계를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국가 내의 지역 간 위신재 교환을 통해 엘리트 계급의 부·정치권력·위신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작용한다(Carol Smith 1976; Hirth 1992).
      게다가 Hirth에 따르면 수송비용으로 인해 지역 간 교환이 이뤄지는 물품은 대부분 사회 내 위신재로 통용되는 것들이다. 즉, 위신재는 단순 값어치로서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지역 간 교역망을 독점하는 지배층의 권력을 과시하는 물품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특히 부여와 같이 여러 문화가 공존하는 지역의 경우 지역 간 교환이 엘리트 계급의 부·정치권력·위신의 중요한 원천이며(Carol Smith 1976; Hirth 1992), 위신재는 일정한 집단에서는 위신재를 소유한 이들의 배타적 권력을 형성하는 도구임과 동시에 타 정치체의 엘리트계층과의 관계를 확인시켜주는 공동 정치화의 매개체 역할을 했다.
      한편, 부여의 토기는 부장토기와 생활유구 출토 토기로 대별할 수 있으며 두 종류의 토기 모두 위신재와 매장되는 맥락이 다르다. 금은제 및 마노·유리구슬로 만들어진 사치품류나, 무기류, 대구류 등의 부장품이 위신재로서 피장자의 정체성과 타 정치체와의 교류의 증거로 매장된 고고자료라면, 부장토기의 형태는 매장행위를 치룬 무덤조성집단의 정체성과 관련된 고고자료이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부장토기의 형태를 통해서 장송의례를 함께 치루는 집단공동체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다. 장송의례의 일련의 과정 중 부장토기의 매납이 가지는 상징성은 매우 크다. 무덤에 부장되는 토기의 대다수는 음식을 담아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제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덤조성집단의 정체성이 오롯이 반영되었을 여지가 크다. 토기 외의 부장품이 피장자의 정체성이 함께 반영되어 매납되었을 가능성이 항시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했을 때 부장토기는 무덤유구의 형태와 더불어 무덤조성집단의 정체성을 구별할 수 있는 부장품에 속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부장토기만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하기에는 현재까지 알려진 무덤유적이 매우 적기 때문에 생활유구 출토 토기군도 함께 분석해야한다. 생활유구 출토 토기는 부장토기와는 상이한 사용·출토 맥락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집단공동체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통한다. 물론 생활유구 출토 토기의 경우 타 집단공동체와 이뤄졌던 일상적 교환의 부수적 결과나 결혼 등의 다양한 맥락에서 유입되어 출토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유사한 토기 기종의 조합이 지속적으로 출토될 경우 이는 전이가 아닌 생산과 보급의 결과물로 판단해야한다. 다시 말해 유사한 토기 기종의 조합은 유사한 생산체계를 공유하거나 집단 내 동일 생산, 혹은 상시적 교류를 통해 형성된 상사성이라는 전제를 두었다. 부여 경내로 추정되는 길장지구 및 일부 흑룡강성·요녕성의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의 경우 주거지와 무덤에서 출토된 토기 간의 제작방법, 기종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생활용 토기의 생산은 크게 가내생산과 취락 내 공동생산, 공방생산으로 대별될 수 있다. 부여 유적의 경우 거주지와 공방유적의 출토수가 적고, 전면 발굴이 많지 않아 현재로서는 생산 단위를 추측하기 힘들다. 그러나 토기는 변형이 가능한 점토로 제작되기 때문에 제작자가 의도한대로 형태나 문양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여 제작 혹은 소비 집단의 기호나 유행이 토기의 기형과 문양 등에 민감하게 반영된다. 이와 같은 토기의 특성을 토대로 토기의 기형과 문양의 상사성은 제작 혹은 소비 집단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토기는 ‘인간’을 반영하며, 여러 지역에서 보이는 토기의 형태와 문양의 유사성은 토기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David el. 1988).
      위의 내용으로 통해 물의 상사성이 형성되는 맥락적 차이를 토대로 위신재의 상사성이 나타나는 범위와 토기의 상사성이 나타나는 범위가 다를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해당 범위들을 바탕으로 부여 내외에서 이뤄졌던 네트워크를 3가지로 나누어 분류할 수 있었다.

     

    부여 네트워크의 종류

      부여의 네트워크는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로 토기기종조합으로 보이는 소지역 내의 관계망이다. 서류송화강유역에서 이러한 관계망은 항시적으로 존재하지만, 서기 2세기가 되면서 토기기종조합의 유사성이 보이는 지역이 한층 확대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국가로서 부여가 형성됨에 따라 각 소지역을 포괄할 수 있는 지방세력이 커졌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소지역 내 네트워크는 상시적인 교류·교환이 이뤄 생활반경으로 볼 수 있다.
      두 번째로는 부여 권역 내의 지배계층 사이의 위신재 교환 네트워크이다. 해당 네트워크는 중거리 권역 내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부여 정치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일정 권역, 즉 서류송화강을 비롯한 요동지역의 지배계층 간에 성립된 관계망이다. 각 소지역별로 토기유물군으로 볼 수 있던 생활권을 독립적으로 형성하고 있으면서도 중거리 소지역 간 위신재 교환을 통해 관계 유지를 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중거리 네트워크에서 위신재 교환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토기나 음식과 같은 물품 역시 교환의 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위신재가 주된 교환 물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타 다른 고고학적 자료와 달리 중거리 사이에서 대부분의 위신재 형식의 유사성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해당 네트워크는 기원후 2세기경 가장 가시화되는데, 이를 부여의 성립과 관련지어 설명할 수 있다. 이때 서류송화강유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특정한 위신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유는 이 일대에서 소지역들의 관계 강화를 통한 하나의 정치체가 성립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간 요서지역과 일부 요동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졌던 위신재(비파형동검과 다뉴경) 교환 네트워크에서 소외되었던 길장지구에서 이전까지 촉각식동검을 통한 지배계층 사이의 관계를 도모하고자했던 이들의 관계가 기원후 2세기 경 국가의 성립으로 인해 더욱 결속적인 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그런데 이때 위신재의 유사성과는 달리 토기기종조합상에서는 유사성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렇듯 두 지역의 위신재와 토기의 양태가 다른 이유는 위신재 교환을 통해 지배계층 사이의 관계는 형성되었지만, 그 외 일상적인 교류가 이뤄진 것은 아니며 국가 중심지에서 파생된 특정한 형식의 토기가 없거나 있었다하더라도 이를 각 지역에서 받아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기한 위신재와 토기 분포상 차이는 부여의 지방자치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이다.

    [그림 2]  중국 네이멍구자치구 巴林左旗石房子村 출토 인장(王未想 1997 「内蒙巴林左旗石房子村发现的夫余族官印」 수록)

      마지막으로 원거리 교류 네트워크가 있다. 원거리 교역망을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첫 번째로는 기원후 2세기 전까지 촉각식동검으로 확인할 수 있는 원거리 위신재 교환 네트워크이다. 서황둔산유적에서 출토된 촉각식동검은 주로 오르도스문화 계통, 즉 흉노문화에서 기인하여 자체적으로 제작했을 것이며, 길장지구의 경우는 부여가 주변부의 엘리트에게 분배한 일종의 연맹적 상징품이었을 것으로 견해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뚜렷한 유사성을 보이는 위신재가 촉각식동검으로 한정되고 길장지구 외에서도 산발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특정 정치체 내의 지배계층 사이에서 교환된 것이 아니라 넓은 범위의 교역 네트워크 과정에서 존재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 과정에서 좀 더 좁은 범위의 지역들이 특정한 형식의 촉각식동검을 변용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때의 촉각식동검 분포권을 통해 서류송화강유역의 길장지구에서는 흉노로 대표되는 북방민족과의 관계 및 연해주일대와의 관계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다음으로 요동지역과는 상당한 거리를 가지는 유적에서 산발적으로 등장하는 여러 부여계 유물로 추정할 수 있는 원거리 교류 네트워크이다. 한반도에서 출토한 동병철검 한강 하류의 철검·금제 이식과 내몽골에서 출토한 부여인장이 대표적이다. 한반도에서는 한강 하류의 유물들 외에도 최근 청주 오송유적에서 출토된 원주식철검이 있다. 이 철검은 돌기가 시문되어 있어 라오허선유적에서 출토된 철검과 매우 흡사하고, 그 외 지역에서는 출토된 예가 극히 적다는 점을 눈여겨 볼만하다. 특히 해당 철검의 병부가 매우 장기간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병부가 훼손된 이후에도 쓰였다는 점에서 원거리 교환 네트워크의 결과물일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유물의 특징은 기원후 3세기 이후의 유적에서 출토하며 수량이 많지 않은 것으로, 중거리 네트워크가 이뤄진 빈도보다 낮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림 3] 네트워크의 도식화 적용(왼쪽부터 소지역 내, 중거리, 원거리)

     

    맺음말

      이렇듯 부여는 생활권으로 추정되는 토기의 소지역권이 각 지역에 형성되어있는 상태에서 부여 권역 내 소지역 간의 위신재 교환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지배계층 간의 관계를 강화 및 유지하는 방식으로 정치체를 구성했다. 이러한 지방자치적인 성격은 문헌상 ‘사출도’와 비견할 수 있다.
      기왕의 연구 성과들을 토대로 살펴보았을 때, 사출도가 부여 중앙에서 외부로 향하는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대외관계를 담당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중요한 점은 사출도와 같은 지방지배방식을 택한 이유일 것이다.
      기원전 4-2세기경 동북지역 일대는 중국의 여러 제후국과 고조선의 영역화가 일어나면서 기존의 네트워크 체계가 무너지고 있었으며, 이와 같은 불안전한 상황에서 각 지역 세력들은 기존의 고조선 네트워크에서 탈락하게 되어 또 다른 지역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국가체 중 하나가 부여인 것이다. ‘사출도’라는 명칭이 정확히 어느 시점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고학 자료의 양상으로 봤을 때 다수의 집단공동체들이 돈독한 네트워크망, 즉 위신재 교환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되면서 하나의 정치체인 부여가 탄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출도와 유사한 형태가 형성기부터 존재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사출도는 중앙에서 임의적으로 편성된 구역이 아니라, 부여 형성 이전에 존재했던 집단공동체 중 큰 규모의 공동체가 이후 교통과 대외관계의 거점지로서 역할을 하며 점차 자원이 집중되자 이후 각 지방의 통치 중심지로까지 역할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서기 3세기 이후 부여계 유적으로 확정 지을 수 있는 유적이 없고, 대형성지나 대형고분군이 없는 점을 3세기경 문헌상 확인되는 선비 慕容廆와 慕容皝의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공격과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대규모 정벌로 인해 부여의 범위가 상당히 위축되었거나 부여 경내 소지역 사이의 긴밀한 네트워크 관계가 약해진 상황과 연결 지을 수 있다.
      부여는 이러한 상황에서 원거리 교류관계를 유지하며 위기상황을 타파하고자 했는데, 촉각식동검의 유사성을 제외하면 이전까지는 찾기 힘들었던 원거리 관계가 오히려 3세기 이후 한반도와 선비, 서진과 유지되며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다는 것을 통해 추정이 가능하다.